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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발레/무용

라 바야데르(LA BAYADERE) - 환상으로만 이룰 수 있었던 사랑





러시아 발레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 버전의 '라 바야데르'가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중이다. 오늘 오후 2시가 마지막 일정으로. 오늘은 부상에서 회복한 이은원씨가 출연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용맹한 무사 솔로르와 신전의 무희 니키야 사이의 비밀스러운 사랑을 이야기의 골간으로 하여 니키야, 솔로르를 각각 짝사랑하는 사제 브라만, 공주 감자티가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며 펼쳐지는 비극이 줄거리이다.


이루어지지 않는 슬픈 사랑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백조의 호수, 지젤과 비슷한 맥락을 따르고 있으며 실제로 플롯, 안무, 무대배경에서 유사한 점이 많이 발견된다. 1막에서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노출된 후 2막에서 궁중을 배경으로 여러 가지 춤이 선보이는 것은 백조의 호수와 같은 구조이다. 솔로르에게 배신당한 니키야가 솔로르와 감자티의 결혼을 축하하는 춤을 추다  뱀에 물려 죽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지젤 1막 마지막 장면과 선율이 유사하다. 밤 시간대를 배경으로 혼령들의 군무가 펼쳐지는 3막은 지젤 후반부와 유사한 설정인데 발레리나의 배치, 동선은 백조의 호수에서 보는 바와 닮아있다. 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면서도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의상, 음악 등에서 유럽 분위기가 짙어진다. 그런 점에서 동양적 분위기를 무대에 완벽하게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19세기 후반 유럽이 호기심, 신비감을 품고 아시아를 바라보던 시선이 느껴진다.


밤새도록 니키야의 혼령과 춤추던 솔로르는 결국 다시 떠나가는 니키야의 혼을 붙잡지 못하고 홀로 남겨지고 만다. 기운이 빠진 듯 바닥에 힘없이 드러눕는 솔로르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현실에서 그는 왕이 정한 대로 감자티 공주와 결혼해야 한다. 니키야에 대한 안타까움이 마음에 남아 있어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왕과 공주의 계략으로 목숨을 잃은 니키야와 자기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솔로르가 사랑을 이루는 길은 혼령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방법을 통하는 것 뿐이다. 몽환적인 공간을 현실의 세계와 평행하게 배치하여 좌절한 인간을 그 곳으로 도피시켜 주는 것은 예술의 힘이다. 바꾸어 말하면 현실 속의 솔로르는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없는 운명이다. 아름다운 예술은 현실 속의 좌절을 위로해 주지만 그것은 거꾸로 현실의 냉엄함을 다시 일깨워준다.


그러나 부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솔로르를 차지한 감자티 또한 승자는 아니다. 솔로르는 마음 속으로는 끝까지 니키야를 품었다. 라 바야데르의 다른 버전에서는 3막에서 솔로르와 감자티가 결혼식을 올린 사원이 신의 노여움으로 무너지고 솔로르는 니키야의 혼령과 다른 세계로 떠나기까지 한다.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마음으로 얻지 못하면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 억지로 소유하는 것은 나와 상대가 모두 불행해진다는 진실이 들어있다. 겉으로는 강자처럼 보여도 사랑하는 이의 옆에서 겉돌기만 하는 감자티에게도 연민이 느껴진다. 


발레를 본 후 춤, 음악에 관한 언급보다 줄거리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것은 작품 자체를 즐기는 안목이 아직 부족해서라고 여긴다. 이번 라 바야데르에서는 동양적인 느낌의 춤 등 다른 발레에서는 보기 어려운 안무가 다양하게 선보였다. 3막에서 튀튀를 입은 혼령들의 군무에서도 속도, 힘이 느껴졌고 관객들의 박수소리도 그에 비례해 커져갔다. 공연을 보는 재미 중 상당부분은 같은 작품을 매개로 서로 모르는 관객들이 잠시나마 하나로 묶이는 데에 있다. 엄숙한 관람 자세가 요구되는 클래식 장르 중에서 발레는 비교적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편이다. 기가 막힌 동작을 성공시킨 후 객석에서 탄성, 박수가 나오지 않으면 발레리나도 당황할 것이 틀림없다. 


다음 번 국립발레단 공연은 6월에 차이코프스키 '삶과 죽음의 미스터리'로 찾아온다. 불행한 결혼생활과 후원자인 폰 메크부인의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이번 라 바야데르 공연시 1막 종료 후 휴식 시간에 6월 공연표를 할인가에 판매하였다. 다만, 좋은 좌석을 고르려고 혼자서 시간을 길게 끄는 무례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았다. 전당 측에서 이런 점에 대해 조치가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