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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극/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거친 바다에서 보트 하나를 의지하여 표류하는 소년과 호랑이. 작년 예고편을 보고 기다려오다가 오늘 보고 왔다. 인간과 동물의 교감, 인간의 눈에 담기 버거운 장대한 파노라마를 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영화 제목은 "라이프 오브 파이". 왜 "어드벤처 위드 타이거"가 아니지?  


중년 인도인 남자 '파이'가 자신의 집을 찾아온 소설가와 대화를 나누며 영화가 시작된다. 소설가는 작품의 소재를 찾으려고 그를 방문한 것. 파이는 유년기부터 자신의 지나온 삶을 풀어내는데.. 



파이의 본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 '피신'이 오줌이란 뜻의 영어단어와 발음이 비슷하여 어린시절 놀림감이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을 줄여 '파이'라고 부르기로 결심. '파이'는 원주율, 3.1415.... 끝없이 이어지는 수이다. 급우들 앞에서 파이의 소숫점 이하 수백자리를 암기하여 깊은 인상을 남기고 이후 '파이'라고 불린다. 무한소수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익히 알고 있듯 인도인의 상상력으로부터 힌두교의 수천가지 신들이 태어났고 수많은 신화가 만들어졌다.


파이의 어머니는 아들들이 어릴 적부터 자장가처럼 힌두신화들을 들려주던 자상한 여인이었다. 아버지는 반면, 종교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파이는 힌두교부터 천주교, 이슬람교까지 두루 믿는 괴짜 종교인으로 성장한다. 그런 파이에게 아버지는 무엇을 믿든 맹신은 안 된다고 일러준다. 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심, 어머니에게 배운 신화 속 상상의 세계 더불어 아버지의 균형잡힌 이성은 파이가 성장하는 중요한 자양분이 된다.  


인도가 독립할무렵 파이의 아버지는 동물원을 차린다. 동물원에 들어온 벵골호랑이 '리처드 파커'. 파이는 처음부터 호랑이의 눈빛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동물원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끊어지자 아버지는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캐나다 이민을 결심한다. 동물원의 동물들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 제 2의 삶을 살기로 한다. 


그러나 태평양 해상에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배가 침몰하면서 구명보트에 탄 파이 혼자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바다에 가라앉는다. 


배에는 다리를 다친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이 함께 있다. 배고픔에 허덕이던 하이에나는 얼룩말을 공격하고 얼마 후 오랑우탄마저 해치자 파이는 참상에 분개하는데 순간 보트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벵갈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튀어나와 하이에나를 죽인다. 결국 리처드 파커와 파이만이 배에 남게 된다. 파이는 배에서 발견한 생존 지침서를 바탕으로 점차 ‘리처드 파커’와 함께 바다 위에서 살아가는 법을 습득하게 된다.


한 배에 탄 생존자들이 동물이라니. 그리고 호랑이와 인간의 아슬아슬한 공존. 믿기 어려운 환타지같은 이야기 아닌가. 그러나 스토리가 계속 이어지다보니 어느새 그 비현실은 그냥 현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태평양 한가운데서.. 집채 만한 고래와 빛을 내는 해파리, 하늘을 나는 물고기, 그리고 미어캣이 사는 신비의 섬 등 그 누구도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사건들을 겪는다. 


파이는 처음에는 자기를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맹수 리처드 파커를 경계하지만 긴 표류생활을 하며 호랑이를 친구로 여기게 된다. 호랑이를 돌보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않았다면 절망적인 상황에서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이야기하는 파이. 


오랜 표류 끝에 멕시코 해안에서 구출된 파이는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지만 그들은 납득하기 곤란해한다. 배가 침몰한 원인을 알기 위해 파이를 찾아온 보험 회사 직원들은 파이에게 그럴듯한 "진실"을 들려달라고 부탁한다. 


동물과 미여캣의 섬 따위가 나오는 동화 말고, 다른 사람들이 믿어줄 그럴듯한 "진실"을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진실"이란 ... 



파이가 들려준 두 가지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었다. 진실을 말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을 뿐. 파이가 난파 후 겪은 사실들은 은유로 다시 재구성되었다.  

작가 앞에서 구술을 마친 파이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작가 앞에서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느 것이 마음에 드냐고 묻는 파이. 어느 쪽을 택하든 그의 과거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쪽을 택하든 진실을 전하고 있다. 나도 그 순간 파이에게 동시에 질문을 받은 기분이었다. 고국 인도와 첫사랑 아난디, 가족을 모두 잃었지만 담담히 이야기하는 파이의 얼굴에 마음의 그늘은 보이지 않았다. 



이 영화가 왜 "호랑이와 함께한 모험"이 아닌지는 작품 말미에 이르러야 할 수 있다. 파이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호랑이에게만 "리처드 파크"라고 이름이 부여된 점도 지금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어린 시절의 파이가 아버지에게 호랑이의 눈동자에도 영혼이 있다고 이야기하자, 아버지는 네가 본 것은 호랑이의 혼이 아니라 호랑이의 눈에 비친 네 모습이라고 말해 준다. 호랑이는 인간의 친구가 될 수 없음을 아버지는 이성적으로 깨우쳐주었지만 파이의 마음 속에서 호랑이는 여전히 그냥 짐승이 아닌 리처드 파크였던 것이다. 리처드 파크는 보트에서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살해한 하이에나를 처지해주고 긴 표류생활을 하는 동안 파이에게 힘이 되어준다. 리처드는 대체 누구?


파이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이겨내는 법을 알았다. 

영화의 마지막은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현실적인 해피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