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발레/무용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백조의 호수' 내한공연




찬바람이 부는 11월. 올해에도 어김없이 발레의 계절이 찾아왔다. 고전 발레의 정수를 보여주기로 이름높은 마린스키 발레단이 11.11(토)-11.13(화)에 내한, 세종문화회관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백조의 호수"를 공연했다. 발레단과 함께 호흡을 맞추기 위해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도 함께 방한하여 수준높은 음악을 들려주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발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백조의 호수'이지만 이 작품은 초연 당시 관객에게 익숙하지 않은 음악, 미숙한 오케스트라의 실력으로 대실패를 하고 만다. 백조의 호수를 불후의 명작으로 재탄생시킨것은 차이코프스키 사후, 안무와 음악을 새롭게 하여 재상연한 마린스키 발레단의 단장 프티파의 노력 덕분이다. 마린스키의 "백조의 호수"는 그 당시의 원안무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모스크바의 볼쇼이극장과 더불어 러시아 발레의 양대기둥을 이루는 마린스키발레단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소재하고 산하에 바가노바발레학교를 두어 무용수를 키우고 있다. 50여명을 뽑아 해마다 3~4명씩 탈락시키는 엄격한 교육으로 최고의 발레리나, 발레리노를 배출한다. 군무를 추는 수십명 속에 섞여 얼굴마저 보이지 않는 발레리나조차 이런 혹독한 시스템을 거친 사람들이다.


발레는 본래 서유럽에서 시작된 무용이다. 영화 '왕의 춤'을 보면 발레에 심취한 루이 14세가 등장한다. 그러나 가난한 여성들이 후원자를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너도나도 발레를 배우게 되면서 수준이 질적으로 저하되었고 실력있는 무용가들이 대거 러시아로 이동한다. 때마침 러시아에서는 황실이 발레를 적극적으로 후원한 덕에 발레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동토에서 꽃피우게 된다.


현재 영국 로열발레단, 프랑스 파리오페라극장,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 등 유명한 발레단이 여럿 존재하지만 차이코프스키 발레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은 마린스키를 만나는 마음은 유달리 설레었다. 이번 공연에는 동양인 최초 마린스키에 입단한 김기민씨도 등장했다. 




11월 찬바람이 부는 거리 홍보포스터가 펄럭인다


군무를 추는 백조들이 턱으로 입구를 가리키며 어서 입장하라고 재촉한다.




11일(일) 공연시, 오케스트라의 서주가 끝나고 갑자기 다시 불이 환하게 켜지는 일이 있었다. 지휘자도 관객도 모두 당황하는데 아나운서의 사회로 D증권 대표이사가 등장하여 환영사를 했다. 환영사가 끝나자 오케스트라는 처음부터 서곡을 다시 연주해야 하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사고가 벌어졌다. 이미 시작한 공연을 후원사 사장의 환영사를 위해 중단시킨 이번 일은 한국의 문화수준을 외국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될 것이다. 


올해 무대에 오른 '백조의 호수'는 지그프리트왕자가 오딜에게 마법을 건 로트발트를 물리치는 해피엔딩 버전이었다. 이와 별개로 새드엔딩에서는 왕자와 사랑을 이루는데 실패한 오딜이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왕자도 뒤따라 투신하는 슬픈 결말이다. 개인적으로 '백조의 호수'는 슬픈 결말로 끝나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로트발트의 농간으로 영원히 마법에서 풀려나지 못하게 된 오딜에게는 비극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구소련 시절, 인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니 행복한 결말로 바꾸라는 공산당의 지시로 새로운 버전이 탄생했다고 한다. 그런 사연의 사실 여부야 어찌되었든 사랑하는 두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불행한 엔드보다야 행복한 마무리를 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니까.. 비장한 흐름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악을 물리친다는 마무리가 다소 논리적인 연계가 부족하기는 한 듯 하지만, 무대를 찾을 때 복잡한 거 따지러 오는 건 아니지 않나, 카타르시스를 위해 오는 것이지. 




첫날 공연은 옥사나 스코릭(오딜, 오데트),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노프(지그프리트 왕자)가 등장

옥사나 스코릭의 연기는 표정이 부족한 듯 다소 아쉬웠다.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노프는 꽃미남 스타일의 발레리노인데 27세를 맞은 그는 이 날 무대에서 올백에 이대팔 머리를 하고 등장했다. 


마지막날 공연에는 올레샤 노비코바, 김기민이 나오다

김기민은 동양인 최초로 마린스키에 입단한 재원. 개인적으로 이 날 오딜, 오데트를 연기한 올레샤 노비코바가 너무 착하게 생겨서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기혼이라니 :(


주역무용수의 커튼콜. 같은 한국인으로서 첫 등장시부터 큰 박수로 맞아준 관객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 김기민 발레리노.

당대 최고의 백조 연기를 보여준다는 울리아나 로파트키나의 무대는 12일에 있었으나 안타깝게 가지 못했지만, 올레샤 노비코바의 연기도 기억에 남을 만했다.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의 연주 또한 좋았다. 외국에서 내한한 발레단의 공연시 국내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우려 없이 매끄러운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사람이 빠져나가는 홀. 언제 다시 이들을 한국에서 만날 수 있을까. 아쉽구나.

러시아 상뜨뻬쩨르부르크에 직접 찾아가도 마린스키의 공연을 볼 수 있는데 다만 외국인에게는 내국인보다 비싼 관람료를 받는다고 한다. 티켓값이 외국인은 100달러부터 시작하는 모양. 더구나 한국에서 직항편도 없나보다. 그래도 언젠가 꼭 직접 마린스키 극장에 가 보고 싶다.

아무래도 수년후가 될 다음 번 내한공연을 기대할 수밖에 없겠다. 그 때에는 이번에 만나지 못한 울리야나 로파트키나를 꼭 볼 수 있기를. 김기민 발레리노도 더 성숙한 모습으로 재회할 수 있기를.


나중에 꼭 다시 만나요, 미즈 노비코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