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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발레/무용

드라마발레 "오네긴"





러시아문호 뿌슈낀의 소설 에브게니 오네긴을 원작으로 하고 존 프랑코가 안무를 짠 드라마발레로 기교를 중시하는 클래식발레와 달리 이야기의 흐름과 무용수의 연기를 중시하는 장르이다. 발레 오네긴은 무명의 슈튜트가르트 발레단을 유명 예술단체로 도약시킨 히트작이다. 원작 소설의 예술성에 더하여 아름답고 우울한 색채의 차이코프스키 곡을 잘 살리고 있다. 무대 역시 단순하게 화려함을 추구하는 대신 스토리의 흐름에 맞게 바뀌어가며 말없는 또 한 명의 배우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곡들을 선곡하여 발레를 위해 관현악으로 편곡한 선율들이 사용되고 있다. 같은 제목의 오페라 '오네긴'이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동일한 음악을 사용할 경우 발레가 오페라와 차별화되지 못할 것을 우려한 존 프랑코가 아예 동명 오페라와는 다른 곡들을 쓰기로 결정한 때문이다. 무대커튼이 올라가며 처음 나오는 음악은 차이코프스키 사계의 '2월', 올가와 약혼자 렌스키의 이인무에는 사계 중 '6월', 주인공 오네긴과 따찌야나의 조심스런 첫 만남에는 '녹턴'의 선율이 흐른다. 러시아 문호의 작품에 흐르는 정서를 그려내기에는 역시 러시아 음악가의 곡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젊은 오네긴과 따찌야나가 처음 만나는 1막에는 푸른 잎을 단 가녀린 나무 몇 그루가 배경으로 서 있고, 몇 달이 지나 오네긴이 따찌야나의 편지를 찢으며 오만하게 그녀를 거절하는 순간에는 잎을 다 떨군 앙상한 나무로 변해 있다. 15년이 지나 공작부인이 된 따찌야나와 오네긴이 재회하는 대저택에는 나무 대신 굵직한 돌기둥이 서 있다. 푸른 잎을 단 희망이 잎을 떨군 절망으로 다시 아무 것도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돌기둥으로 변해 가는 과정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흘러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거울 속에 비치는 사람이 미래의 결혼상대자가 된다는 러시아 미신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작품을 관통하는 모티브이다. 따찌야나가 친구 렌스키를 따라온 오네긴이 거울에 비치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모습은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깊은 밤 그녀의 침실에 세워진 커다란 거울은 오네긴에 대한 따찌야나의 갈망이 매우 크다는 뜻이다. 훗날 그레민공작의 아내가 된 그녀가, 길을 떠나기 전 부인에게 인사하러 온 공작의 모습이 거울에 비추자 깜짝 놀라는 것은 현실에서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편에게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어릴 적 사랑 오네긴을 향한 갈망 사이에서 여전히 내면의 갈등을 벌이고 있음을 드러낸다.     


따찌야나가 오네긴을 만나 짝사랑을 하게 된 후 그에게 보낼 편지를 쓰다가 잠시 잠에 빠져드는 동안 거울에서 걸어나온 오네긴과 둘이서 춤을 추는 꿈은 매우 환상적이다. 여자를 어깨에 얹고 빙빙 도는 춤동작은 결국 그 당시 따찌야나가 오네긴에게 품었던 기대에 다름아니다. 그 기대는 현실에서 냉정하게 거부당하고 만다. 15년 후 오랜 방황을 마치고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오네긴이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나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며 이번에는 반대로 오네긴이 따찌야나에게 사랑을 호소하는 이인무를 춘다. 15년 전 꿈 속에서나 출 수 있었던 오네긴과의 춤을 이제 현실에서 출 수 있게 되었지만 결말은 새드 엔딩이다. 이미 결혼한 그녀는 오네긴의 편지를 찢으며 단호하게 나가라고 손짓하는 것으로 둘의 관계는 끝난다. 


오네긴은 남자무용수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드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 발레 작품의 포인트는, 젊은 시절 경박하던 오네긴이 오랜 세월이 지나 가련한 노신사로 변해 돌아오는 장면에서 관객이 깊은 연민을 느껴야 한다는 점이다. 따찌야나의 고백을 사려깊지 못하게 가볍게 거절하고 친구 렌스키의 약혼녀 올가를 유혹하다가 렌스키와 결투를 벌여 죽게 하는 악행에도 불구하고 오네긴이 진정 악인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 훗날 초라해진 오네긴을 미워할 수 없는 전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발레리노의 연기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동탁, 엄재용, 이현준 씨의 연기를 한 번씩 보았다. 개인적으로 엄재용 오네긴이 마음에 들었다. 젊은 시절 자신만만하기만 하고 경박한 행동을 자제하지 못하여 큰 실수를 하지만, 그 후 세월을 낭비하고 늙어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와 이번엔 거꾸로 따찌야나에게 차갑게 거절당하는 모습에서 관객 자신의 모습이 겹쳐져야 한다. 함께 연기한 황혜민 발레리나와 결혼한 기혼 무용수로서 나름의 연륜과 경험이 느껴진달지 하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마지막 날 관람한 이현준 오네긴의 젊은 시절 연기에서는 그저 나쁜 놈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고, 훗날 반백의 노신사로 다시 찾아온 오네긴은 젊은 시절의 오네긴과 같은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어색했다. 


작품의 주역인 오네긴-따찌야나 커플에 묻히기 쉬운 것이 올가-렌스키 커플인데 이들 역시 스토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발레리나는 올가의 경박하지만 악의없는 성품을 잘 나타내야 하는데 김나은씨가 연기한 것이 잘 어울렸다는 느낌이다. 체격이 작아 장차 발레리나로서 대성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지만 이제는 당당히 주요 배역을 따내고 있다.


13일 토요일 저녁 공연은 이번 작품을 마지막으로 은퇴하는 강예나씨가 따찌야나를 연기했다. 오네긴역으로 엄재용씨가 마음에 들었다면 따찌야냐역으로는 바로 강예나씨가 최고였다는 감상을 적어본다. 공연 종료 후 무대 인사에서 관객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감격에 젖어 어쩔 줄 모르던 모습이 아직도 눈 앞에 선하다. 인생의 커다란 결실을 거둔 모습을 보며 부러움마저 솟아나는 장면이었다. 오랫 동안 관객에서 기쁨을 선사해 준 그녀에게 앞길에도 빛이 있기를...




유니버설발레단 '오네긴'  2013. 7.6 -2013.7.13


황혜민, 엄재용 포토타임


강예나, 이현준 포토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