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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오페라

12월의 오페라 '라 보엠'





해마다 12월이 되면 단골처럼 찾아오는 공연 레퍼토리로는 발레 중에서 호두까기인형이 있다면 오페라로는 라 보엠이 있다. 가난하지만 순수한 사랑을 나눈 젊은 연인들의 이야기라는 멘트와 함께 소개되곤 하는 작품이다. 


이번 국립오페라단의 공연에서는 무대장치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고층의 좁고 어두운 방 안에 친구들이 모두 모여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가난의 느낌이 폴폴 풍긴다. 청년들은 꿈을 찾아 파리로 왔지만 그들이 실제 만난 것은 성공이 아닌 빈곤이었다. 아가씨들은 마음은 가난한 애인에게 있어도 현실은 돈을 택해 부자나 귀족의 정부가 된다. 


전통과 구습에서 자유로운 도시로 나와 화가, 시인, 철학자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은 겨울에 난롯불을 피우기 위해 자신들의 습작물을 불쏘시개로 쓴다. 무제타는 마르첼로는 사랑한다면서도 현실에서는 옷과 보석을 사 줄 수 있는 늙은 부자와 함께 다닌다. 가난한 연인들끼리 순수한 사랑을 시작한 로돌포, 미미 커플조차 병이 깊어지며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남자를 여자가 떠나 어느 귀족의 정부가 되며 이별하고 만다. 백 년도 더 오래 된 시절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지금 바로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태어난 금색의 야차는 오늘날 더욱 그럴듯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뭇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지 않은가.


속박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하는 보헤미안같은 젊은이들이라도 육신을 가진 이상 의식주의 속박을 벗어나 정신의 자유만을 누릴 수는 없다. 로돌포는 병에 걸려 죽어가는 미미에게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해 줄 토시조차 사 줄 수 없었다. 그나마 귀족인 애인에게 받은 보석을 팔기로 한 무제타와 외투를 벗어 팔기로 한 친구들이 미미에게 약간의 도움이 되었다. 

 

이 오페라가 배경으로 삼는 19세기 파리는 이미 돈을 벌어야 살아갈 수 있는 자본주의 경제가 확고하게 뿌리박은 시대였다. 돈은 가장 순수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랑도 비틀 수 있는 힘을 가졌다. 라트라비아타 또한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진 작품이고, 일본의 금색야차, 이를 번안한 식민지 조선시대의 이수일과 심순애는 모두 금권이 인간의 정신세계를 파고들기 시작하던 시대를 공통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전근대에서는 신분이 자유를 구속했다면, 시민혁명 이후 시작된 근대는 겉으로는 자유를 표방했지만, 사실은 신분의 지배가 자본의 지배로 바뀐 것 뿐이다. 


넓은 무대 대부분을 버려 둔 채, 왼쪽 구석에 오늘날 원룸 건물을 연상시키는 구조물을 세워놓고 그 안의 좁고 어두운 방 한 칸에 모든 등장인물이 모여 대부분의 시간이 흘러간다. 가난한 청춘에게 허락된 공간은 딱 그만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전달하는 표현이었다. 


미미, 로돌포가 처음 만나 불 꺼진 방에서 잃어버린 열쇠를 찾는 장면은 압권. 그 장면에서 미미가 부르는 멜로디는 마지막 여자가 숨을 거두는 장면에서 다시 불리우며 지나가버린 안타까운 사랑을 다시 상기시킨다. 


매년 12월의 손님같이 찾아오는 작품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볼수록 이 작품은 몰인정한 자본의 시대에서 순수한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웠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며 눈물짓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