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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 춘천



전철 플랫폼 왼편으로 펼쳐지는 깊은 물의 흐름, 반대쪽 오른편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에 솟아있는 산봉우리, 그 사이에 꿈꾸듯 조용히 자리잡은 시가지. 춘천의 모습이다. 첫인상은 물 반, 땅 반. 정확한 비율은 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와 상관없이 춘천이란 곳은 언제나 물에 접해 있고 안개에 싸여 있는 도시이다.
역 출구는 두 개. 하나는 의암호 방향으로 나가는 출구, 나머지는 명동으로 이어지는 출구. 상봉역에서부터 흘러 온 파도같은 승객의 인파는 오직 시내방향 출구로만 쏟아져 나갈 뿐, 의암호 쪽 나가는 복도에는 발자국 하나조차 찍히지 않는다. 저 군중들은 시내로 몰려다니며 닭갈비집, 막국수집 매상을 올려줄 것이다. 춘천시내 인구와 맞먹는 하루 16만여명이 새로 개통된 전철을 통해 강원도 소도시에 몰려든다고 하니 정적 속에서 잠자던 도시는 갑자기 깨어난 기분일 것이다.
시내가 흥청거리건 말건, 깊고 푸른 호수는 묵직한 무게감으로 도시 한 쪽을 단단히 누르고 있다. 옛적부터 깊은 호수에는 그와 얽힌 전설이 많았다. 물 속에 사는 용이나 괴물 이야기 같은 것들. 의암호 자락에 인어상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사연이 있을지 궁금하다. 그저 보기 좋으라고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인어상을 적당히 세워놓은 것일수도 있겠지. 의암호 자체가 댐이 생기며 만들어진 인공호수이니 춘천이 호반의 도시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길어야 반 세기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댐으로 조성된 인공호수들은 춘천을 북쪽에서 서쪽으로 빙 두르며 시내 넓이와 맞먹는 면적을 갖게 된다. 그러니 역시 춘천은 물의 도시이며, 잠자듯 고여있기도 하고 잠에서 깨어나듯 찰랑거리기도 하는 물결을 바라보아야만 이 곳을 여행했다고 할 수 있다.
위로부터 소양강댐, 춘천댐, 의암댐이 만들어 낸 묵직한 물덩어리는 시내 면적과 엇비슷하여 원래부터 그다지 붐비지 않는 조용한 시가지의 미약한 소란스러움을 흡수하는 듯하다. 이 도시는 도청과 시청이 있는 명동 주변과 강원대학교 주변이 다소 활기찰 뿐, 대체로 특징없고 한산한 전형적인 중소도시이다. 짙고 묵직한 댐 사이에 갇힌 물덩어리는 고요함과 안개를 만들어 주변에 퍼뜨리며 도시의 성격을 규정해왔는지도 모른다. 어디엘 가나 하나씩 있는 시청과 주변 번화가 그리고 중심가를 둘러싸는 답답한 시가지는 대한민국 도시를 규정짓는 획일성인데 산과 호수가 빚어내는 때로 우울에 가까운 고요함과 안개라는 무채색 자연물이 있어 이 곳은 그 나름 아름다운 장소가 될 수 있었다.
산과 호수, 안개 그리고 그것을 접하며 살아가던 사람들. 그런데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은 기간에 춘천 인구의 십 수배의 방문객이 다녀갔다. 그들에게 안개는 아름다운 풍경이며, 산 아래 좁은 시내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일 수 있다. 대개 몇 시간 길면 며칠 머무는 그들은 명동거리의 화려함만 기억하고, 상봉행 전철에 다시 몸을 싣는다. 춘천역의 위치 자체는 다소 휑한 느낌이 드는데, 옛날 경춘선 열차에서 내려 역 출구로 나왔을 때 방문객을 맞아주던 것은 흐린 하늘 아래 봉의산과 역 바로 옆을 흐르는 호수에서 피어올라 역전을 메운 안개였다. 지금은 그 때와 비교할 수 없이 늘어난 주변 유동인구 덕에 더 이상 우울한 감상에 젖을 수도 없게 되었지만, 출구에서 나온 행력은 옛 캠프페이지 사이 인도를 따라 명동으로만 향하는 통에 의암호는 발길 드문 고요함에 여전히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