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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뷰



이미 본 듯한 느낌. 데자뷰. 경험과 기억이 쌓일수록 점점 더 자주 일어나는 현상. 나이 많은 사람의 데자뷰는 지혜가 될 수 있다. 과거에 겪은 사건과 유사한 맥락이 먼 훗날 재현될 때, 시간의 간극을 넘어 둘 사이의 상동성을 포착한다. 가령 1962년의 화폐개혁을 경험한 세대는 얼마전부터 심심찮게 등장하는 리디노미네이션 이야기에 민감하다. 그 당시 구권화폐의 형태로 자산을 보유하던 지인들이 큰 손실을 보았던 것이 기억에 각인되어 있는 이전 세대는 마찬가지로 미래에 화폐단위변경이 현실로 될 경우에 대비해 미리 조치를 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 절박감은 경험에서 비롯하는 것이기에 그런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 젊은 세대는 공감하지 못하거나, 그들의 행동을 논리로만 설명하려 든다. 논리를 펼치는 데에는 전제와 변수가 바탕이 된다. 그러나 경험의 폭이 좁은 이는 논리의 전제가 단순하고 감안하는 변수가 빈약하므로 자기가 아는 일부 지식만을 조합하여 형식 논리에 바탕을 둔 결론을 내놓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결론은 입력 변수를 변화시키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므로 단지 일정한 조건을 가정할 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 정도의 의미밖에 없게 된다. 호소력 없는 논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지식은 많지만 경험 없는 이는 '말만 많고 실제로 하는 것은 없는' 사람이기 일쑤이다. 뭔가 현란한 지식과 복잡한 논리를 쏟아내지만 그 스스로도 자기 확신이 없는 탓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공허한 주장을 쏟아내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것이 된다. 입을 부지런히 놀리는 것 또는 쉼없이 펜을 움직이는 것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을 감추는 수단이 되어 버린 지식인들이 많다.
중국의 등소평은 남순강화 당시 관리들에게 '헛소리는 적게 하고 일은 알차게'하라고 했다. 옛 글에는 '글 배운 이가 세상에 가장 큰 해악'이라는 말도 있다. 그들이 정말 세상에 도움이 될 때는 스스로 긴 세월을 겪은 끝에 언젠가 젊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데자뷰를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올 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