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이상이라면 거의 기억하는 이름 "빨강머리 앤". 저녁마다 tv앞에 앉아 기다리던 브라운관 속의 친구 앤 셜리. 향수에 끌려 다시 한 번 만나보기 위해 주말에 극장을 찾았다.
"빨강머리 앤"이라 하면 지금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로 시작하는 밝은 느낌의 주제가이다. 그 모습 그대로 볼 수 있을까. 마치 오랜 옛 적 첫사랑을 만나러 갈 때의 조심스럽고 두근거리는 마음이었다.
한편으론 기대반 걱정반이었기도 한 것은, 각각의 독립된 회차로 구성된 원작애니메이션을 어떻게 2시간짜리 극장판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단지 원작의 전반부 몇 회를 이어서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저 큰 스크린으로 TV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을 테고, 극장판을 위해 새로 편집했다면 원작과 너무 멀어지게 될까 염려되었다. 아무튼 스크린이 올라가고 기억 속의 친구 앤이 등장하는데...
주제가가 낯설다. 익숙한 전주가 나오고 "주근깨 빼빼마른~"으로 이어지던 그 노래가 아니다. 왠지 고향의 모습이 달라진 섭섭함, 옛 연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다. 국내에 방영된 빨강머리 앤의 원작이 일본의 "赤毛のアン"이므로 원작 속의 ost를 들려주는 모양이다. 옛날에 우리집 케이블에 잠시 NHK가 잡힌 적이 있을 때 거기에서 같은 작품을 방송해 주었는데 그 때 들었던 노래들이었다. 한국판 빨강머리앤 주제가에서 명랑하고 밝은 이미지를 더 띄우고 있다면, 일본판 앤에서는 마음속 어두운 그늘을 떨치려고 애쓰는 모습이 더 두드러진다.
이후 스토리전개는 이미 기억 속에 익숙한 장면들이 그대로 이어진다. 빨강머리 앤의 1화부터 3,4화 정도까지의 분량이 2시간에 걸쳐 흘러간다. 극장판을 위한 새로운 편집은 아니었고 원작 전반부에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이라는 부제를 붙여 영화화한 것이다. 원래 하루 20분씩 나누어 보던 이야기를 한 자리에서 계속 보려니 다소 피로한 느낌이 들었다. 관객은 엄마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엄마들은 대개 내 또래이므로 어릴 적 추억을 더듬으며 열심히 보는데 아이들은 지루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더구나 그 아이들에겐 3D 애니메이션이 익숙하지 옛날의 손으로 그린 터치는 낯설 테니 더욱 친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본 "빨간머리 앤"이 걔네들에게는 어떻게 기억되었을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어릴 적 TV에서 방영해 준 "빨강머리 앤"을 열심해 보았고, 대학생 시절에는 캐나다 방송국에서 제작한 드라마 "Anne of Greengables"도 빼먹지 않고 보았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원작 소설 세트도 갖고 있다. 나의 "앤"사랑은 이렇게 어린이 시절 보았던 만화영화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 영화를 본 꼬마들이 어른이 되어 원작 소설을 구입하고 앤 드라마를 보게 될 지는 의문이다. 30대 관객의 향수만을 타켓으로 영화를 내놓은 느낌이 들어 아쉽다. 어차피 우리는 점차 나이들어 갈 테고 30대의 취향이 어린이, 청년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그저 올드한 마이너 취향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이집 저집을 전전하며 마음의 그늘을 지니게 된 소녀 앤 셜리, 마찬가지로 한평생 미혼으로 살며 대화조차 없이 조용한 절망 속에 시들어가던 나이든 매튜, 마릴라 남매. 이들이 가족을 이루며 초록지붕집에 행복히 깃들기 시작하는 이야기는 세대를 넘어 마음에 따뜻하게 전해지는 바가 있다. 마을로 가는 길에 있는 "기쁨의 하얀 숲"은 앤과 매뉴, 마릴라의 불행이 이제부터 걷혀질 것이라는 상징으로 보였다. 수다스러운 앤이 남매와 같이 살기로 결정되면서 초록 지붕 집은 그 색 그대로 생기에 넘치는 집이 되어간다.
앤의 입양 후에 수많은 에피소드가 이어지지만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역시 앤이 초록지붕집에 들어가기까지의 이야기이다. 부모 없는 여자아이를 누구도 자신들과 동등한 인격으로 보지 않는다. 매튜 남매를 만나기 전 여러 집에서 앤을 맡았지만 그들은 앤에게서 노동력을 원했던 것 뿐이다. 매튜와 마릴라가 앤을 받아들인 것은 그저 소녀가 불쌍해서? 그들도 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이든 남매는 앤의 노동력이 아닌 아이의 순수하고 밝은 마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울하고 칙칙하게 저물어가는 노년을 밝혀 줄 아이의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 마릴라는 앤을 다시 집에 데려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모두 행복해지게 된다. 앤을 돌려보내느냐 다시 데려오느냐는 진정 그들 셋 모두에게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영화가 잘 전달했는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빨강머리 앤"의 원작 자체가 드라마틱한 기승전결보다, 소소한 일상의 일들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그려내는 데에 장점이 있는데 이런 작품을 영화로 만들 때는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함정을 극복해야 한다. 몽테크리스토백작, 레미제라블 등 불문학 작품의 스케일과 대비되는 소소한 일상과 자잘한 대화로 이어지는 영문학의 일상성이랄까 하는 특성이 소설 아닌 영화매체에서는 관객흡인력에 문제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래도 추억 속 애니를 이렇게 다시 만났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반가웠다. 이런저런 아쉬움도 "빨간머리 앤"에 대한 애정이 있는 때문이다. 훗날 내가 중년이 되어 서점을 찾을 때 빨강머리 앤 소설세트를 집어드는 젊은 학생들을 많이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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